Miky's 미국 간호사 이야기
Miky's 미국 간호사 이야기

나의 운동(movement)이야기 1

Miky
2022-01-24
조회수 183


나는 72년에 태어나서 9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가고(산골 소녀라서 막내동생을 돌보느라), 92년도에 대학을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 고입 시험을 보고 도시로 지원한 나는 "뺑뺑이"(추첨)으로 고등학교를 배정 받았다.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도 존재 하지 않은 시대였고, 교복 자율화로 사복을 입은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고, 학력고사를 치러서 대학에 들어가는 마지막 세대의 전 이기도 했다. 아주 단순하게 내신을 가지고 대학과 , 과를 지원하고 그리고 학력고사 점수만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

우리세대는 소위 "신세대"로 불리어지는 X세대다.  X세대는 서태지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지금은  MZ : Millennial Z Generation).  나는 학생운동의 마지막 전 세대이기도 하다. 92년도에 국립대 간호학과를 입학하고 들어가자마자 학생운동이라는걸 참여하게 되었다. 난 어렸을때부터 대학에 가면 "데모"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자라온 환경 탓인지 난 항상 뭔가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며 자랐다. 초등학교때 대통령을 전두환이라고 했다고 혼난일도 있었고, 중학교때는 전교조를 막 결성하기 전, 우리 담임선생님이랑 한겨레 신문을 가지고 함께 토론을 하고, 그리고 고등학교 무용수업 시간에 (그때 여학교는 체육, 무용 수업이 있었다) 각자 음악을 선정하고 독무를 해야하는 발표시간이 있었는데 난 김광석 (노찾사)에 '광야에서"를 가지고 불끈 주먹을 쥔 학생운동가가 되어서 춤을 추게 되었다. 선생님의 평가는 '너무 우울하고 무겁다'라며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1991년, 전국 곳곳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었고, 13명의 학생운동가들이 경찰폭력에 그리고 분신자살, 투신자살로 사망한, 전국의 도시가 하루가 멀다하고 최루탄 가스로 뒤덮어졌던 해였다. 고등학교 3학년 당시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저 학생운동에 동참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간호학과 학생이 학생운동을 한다는건 아주 드문 일이라 다들 우리과 친구들은 날 신기하고 측은하게(?) 여겼다.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항상 마음으로 응원한다고 격려해주고, 내가 수업에 빠진날은 필기노트를 요약정리해서 시험보기 전에 빨리 이거라도 봐야 한다며 보여주는 친구, 집회가 있을때 가끔 내 옆에 와 앉아서 시간을 함께 보내주었던 친구, 그리고 선거운동이 있을때 내 옆에 서서 함께 선거운동을 해주었던 친구들. 그당시 우리 과는 의과대학 소속 간호학과였는데 의과대학 학생회는 소위 말하는 '자주' 학생회 그러니까 나랑은 '사상'의 차이가 있어 항상 나 혼자서 의과대학 강당 앞에서 선거운동을 해야했다. 지금 생각하면 용기(?)가 대단했다.

난 겨우겨우 턱걸이로 간호학과 졸업을 하고 국시를 보고 본교학교는 데모를 한 학생으로 찍혀서 그런지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 병원에 입사하게 된다. 이 병원을 고른것도 노조활동을 참(?) 잘하고 있는 곳이라 이 병원을 선택하게 되었고, 96년도 병원에 입사하자마자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고 96년-97년 민주노총 총파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병원 퇴사한 1년 전까지 노동조합활동과 병동일을 함께 정말 열심히 투쟁하면서 나의 한국에서의 병원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96년도 병원에 입사해서 간호사로서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6개월은 정말 생존싸움이었던 것 같다. 수간호사의 비합리적인 권력 휘두르기, 그리고 선배 간호사들의 태움, 말도 안되는 잡일(?), 거지같은(?) 병원의 물품 공급, 서울의 이름난 사립대 병원치고는 참으로 어이없는 시스템이었다. 한 예로 110v 전기선을 유지하는 병원은 가습기를 환자들에게 직접 가져와서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환자들의 보호자들은 220V 가습기를 가져 오고, 나는 병원의 전력은 110v 이니 도란스( transformer-변압기)가 필요하다고 공손하게 양해를 부탁 " 하면, '이따위 병원이 다 있나'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면 난 " 보호자분 말씀이 맞습니다. 저 병원 윗선에 가셔서 제발 항의를 해주십시오' 내가 유일하게 용기있게 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근데 정말 한번은 병원 총무과장이 나에게 와서 '오간호사 당신이 환자 보호자분께 병원 관계자에게 그 항의를 하라고 했느냐고' 물으러 왔다. 당시 나는 신규 간호사이기도 해서 덜덜 떨면서 "네, 제가 말했습니다. 솔직히 보호자분들이 항의할 때마다 이 병원직원으로서 간호사로서 너무 창피합니다" 라고. 믿는구석, 노동조합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용기가 났던 것 같다. 그 후, 몇년 후에 병원은 리모델링을 하게 되고, 병원은 간호사들의 오프까지 뺏어가면서 그렇게 간호사들을 댓가없이 부려먹었다. 

한국에서의 병원 생활은 노동조합활동으로 병원의 간호사 인력문제 개선, 간호사 근무조건 개선, 임금인상 등 간호사 뿐만 아니라 병원 노동자들의 근무조건 개선을 위해 나이트 근무때도 잠을 2-3시간도 못자고 집회에 참여하고 다시 나이트 근무를 할정도로 나에게는 엄청난 투쟁의 시간이었다.  함께 했던 선배들, 동지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버틴것 같다. 결국 노동조합 리더들에 대한 배신감, 노동조합의 정치권력 싸움에 노동조합을 그만두고 미국에 왔지만 난 지금도 한국간호사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신규간호사들의 죽음, 열악한 간호사: 환자 적정인력 비율이 시급하게 해결 되어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고, 멀리서나마 행동하는 간호사회랑 그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20-30년 전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걸고 싸운 선배 간호사들이 있었다. 많은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지만 그렇게 우리는 투쟁했노라고, 그리고 2022년 지금도 우리는 투쟁하고 있다고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멀리서나마, 우리 함께 하자고 손내밀어 본다. 아주 조금씩 바뀌더라도 간호사들이 죽어나가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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